밤늦은 시간, 집에 들어오니 TV에서는 오락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어느 연예인이 출연해서 자기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국에서 제시한 단어를 부인의 입을 통해 나오게 하도록 유도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제시한 단어는 ‘징그러워’였고 출연자는 상대방인 부인에게 이 말이 나오게 하려고 출연자는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끼리 끌어안는 얘기를 꺼내며 부인으로 하여금 ‘징그러워’라는 정답을유도하려 했는데 정작 그 말은 안나오고 다른 말들만 오갔다.

TV 화면 밑에는 자막으로 ‘징그러워’라는 정답이 나와있고 사회자와 출연자는 계속 그 단어가 나오게 하려고 애를 쓰는, 매우 전형적인 쓸데없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열심히 볼 줄 알았던 아내는 언제부터인지
방한쪽 구석에서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다림질.

세상에 힘만 믿고 살아온 아내는 특유의 급한 성격과 넘치는 힘 때문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다림질을 한다.
여기서 잠깐 아내의 다림질을 슬로우 모션을 통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1. 다림질 할 옷을 다림판에 올린다.
2. 옷을 펼치고 물을 한사발 뿌린다.
3. 그때서야 다리미의 전원을 연결하지 않은 사실을 생각하곤 전원을 켠다.
4. 전원을 켜자마자 다림질을 시작한다.
5. 뜨겁지도 않은 다리미로 옷을 사정없이 누른다.
6. 또 누른다.
7. 이마에 땀을 한번 닦고 또 누른다.
8. 옷이 펴지거나 다림판이 부러진다.

이것이 바로 아내의 환상적인 다림질 방법이다.


옆집에 가려면 산길로 200미터 가야 하는 곳에서 자랐다는 아내,
국민학교 5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다고 기억을 더듬은 아내,

개구리, 메뚜기는 물론 물방개에 올챙이도 잡아 먹었다는 아내,
그나마 서울 태생인 내가 아내의 시골 이야기를 넋을 잃고 들어주니 더 신나던
바로 그 아내는 옆에서 열심히 다림질을 한다.
물론 자신이 입고 출근할 옷이다. 내옷을 다려준 적은 거의 없다.
나도 아내의 다림질 하는 모습을 보면 감히 내옷을 다려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잠시 아내가 다림질 하는 모습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도 TV에서는
정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연예인들이 보인다.

문제의 정답이라 할 수 있는‘징그러워’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출연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졌다.

“뱀을 보면 무슨 생각이나? 응? 네 글자로?”

그리고 그 연예인은 확신이 가득 담겨 있는 표정으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방의 정답이 나와야 하는 그 짧은 순간 방 한 구석에서 다림질을 하던 아내가 조용히 답을 말했다.


“맛 . 있 . 겠 . 다”


그리고 나는 얼마전에 아내가 집앞에 생긴 꼼장어 집에서 꼼장어 3마리를 사와 미친듯이 먹다말고 문득 생각에 잠기던 아내의 오래전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왜 아내가 꼼장어를 먹다 말고 생각에 잠겼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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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가끔 자신의 과거를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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