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환이와의 만남 1

사실 난 ‘동갑내기 과외하기’같은 시츄에이션을 상상했다. 스무살의 재수생과 미모.. 는 아니지만 어쨌든 스물세살의 여대생의 불꽃튀는 과외시간. 조잘대는 열네살짜리 계집애들에겐 질렸거든. 사실 훤칠한 스무살의 청년을 기대하며 과외비를 조금 깎아준거다.

방문을 여니까 긴장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짱달막한 오타쿠처럼 생긴 소년이 서있었다. 동그랗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비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미소지으며 첫대사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

「선생님이 세 번째군요」

뭘 잘못들었나?

「네? 」

「선생님이 세 번째라구요. 이번에 면접 본 세 번째 사람. 과연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어머니는 내게 맡길거 같은데요..」

「어머니 말은 믿지 마세요.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이니까」

오타쿠에다 씨니컬하기까지 하군. 나도 어릴땐 이랬지.

「그래도 어떤 선생님하고라도 공부는 해야 되지 않아요? 난 이미 재수를 했고,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어요.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나랑 과외를 하지 않는다해도 몇가지 팁을 가르쳐줄 수 있는데요」

「저는 공부하기 싫습니다」

「그럼 왜 재수 하는데요?」

「부모님이 하라고 강요하니까요」

「그럼 어차피 해야된다면 즐겁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지금 니가 하기 싫어도 나중에 어른이 되선 ‘그때 할걸’하고 후회할 날이 올지 모르잖아요 」

「안그럴겁니다」

「하지만 미래 일은 알 수 없는거니까, 그냥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적어도 나중에 ‘공부 열심히 안 할 걸 그랬다’하고 후회하진 않을테니까 말이예요 」

「 전 왜 대학을 가야하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 왜? 장래희망이 뭔데요? 」

「 제꿈은..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세계의 평화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 세계에도 환멸을 느끼고.. 그래서 외교관이 되서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나보네. 그래, 어릴땐 나도 그랬지. 세계의 평화, 좋지.

「 외교관이 되려면 좋은 학교에 나와야되지 않을까요? 」

「 다들 그렇게 말해서..그런게 너무 속물적인거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게다가 외교관이 된다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

「 왜요? 」

「 저 한사람이 뭘 한다해도 바뀌는건 없습니다. 외교관 한명이 그리 큰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 그래요? 그럼 행정고시봐서 5급 사무관이 되는건 어떨까요? 정책현안을 결정하고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건데, 그럴려면 명문대 경제학과에 가는게 제일 좋은 선택 아닌가요? 」

「 전 명문대라는 존재가 싫습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비위를 맞춰줘야하고.. 선배한테 복종하고.. 축제에도 억지로 나가야하고. 」

흠....

「 대학에선 아무도 그런거 강요하지 않아요.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은 그냥 혼자 둬요」

「 저는 그런게 오히려 무섭습니다. 혼자가 되는것.. 」

왜 이랬다 저랬다하는데.

「 아니 왜요? 」

「 세상이.. 무섭습니다. 전 사실 따돌림을 당해서 전확을 왔습니다. 애들이 절 가둬놓고 때리더라구요. 그래서 전 뭐라도 잘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죽어라 춤을 배웠습니다. 그 아이들의 시선이 달라지길 기대하며 장기자랑때 미친 듯이 춤을 췄습니다. 」

「그래서 달라졌어요?」

「아니요, 오히려 제 별명은 ‘또라이’였는데 ‘춤추는 또라이’로 변했습니다.」

「 못된 애들이네요. 유치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대학엔 그런 애들 없어요. 다들 자기 할일 하느라 바쁘거든요. 저도 고등학교때 못생기고 평범한 그런 애였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냥 제 할일 하면 되니까 즐거워요 대학교땐 다 자기 하기 나름이예요.. 그쪽도 귀엽게 생겼으니까..」

뭐, 중학생처럼 생겼으니 일단 귀엽다고 해주지.

「 재수하는 일년 동안 스스로를 향상시키는게 어떨까요?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가고, 또 운동도 해줘서 몸 좀 만들고 잘 웃고 다니면 분명 인기 많을거예요」

「 전 튀고 싶지 않습니다」

「 튄다는게 아니라, 그냥 괜찮은 사람이 되면 사람들이 알아서 인정해줄거예요」

「 전.. 한사람만 저를 좋아해주면 됩니다. 그 여자애를 좋아해서 고백을 했습니다. 고백이란 분명 떨리고 아름다운 것이여야 하는데 그 여자애는 절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갈 땐 전 ‘나는 죽어도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다시 그 아일 만났는데 그 아인 절 보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나라도 그러겠다! 키작고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음침한 오타쿠를 좋아할 여고생이 어딨다고.

「 그래? 대학가면 더 이쁜 애들 많은데요.. 걔가 아직도 좋아요? 」

「 네...」

저 수줍은 미소라니... 조금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어쨌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멋져지면 걔도 분명 좋아해줄 거예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절 좋아하길 원합니다. 조건적인건 싫습니다」

흥. 넌 뚱뚱하고 못생기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남잔지 여자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그런 여자애가 와서 ‘내 조건을 보지 말고 내 영혼을 사랑해줘’라고 말하면 그럴 수 있겠니?

「 그래도 공부도 잘하고 멋져지는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요? 」

「 사실 저도 노력을 했지만 변하는게 없었습니다」

「 그래요... 정말 노력했어요?」

「 음... 아니요」

누구 놀리냐...

「 왜 안했어요?」

「 전 공부가 하기 싫었습니다. 엄마가 가식적으로 공부를 강요하는 것도.. 권위적인 아버지도 싫고...」

「 부모님은 본인을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시는 거겠죠」

화제전환을 해야겠네. 남의 집안사에 파고들고 싶진 않거든.

「 그런데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예요? 」

「 음.. 전태일 평전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게 멋져 보였습니다」

니 부모님은 널 위해 희생하고 있단다!

「그래요? 그럼 거기 나오는 시다들이랑 전태일의 가장 큰 꿈이 뭔지 아세요? 」

「뭐죠? 」

「 교과서를 읽는 것. 학교에 나가는 것. 다른 애들처럼 교복을 입고 공부를 하는 것이죠」

「 풋.. 선생님도 우리 부모님과 말씀하시는게 똑같군요」

「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는 애들을 가장 부러워했어요」

「 그건 모두들 자신이 못하는걸 동경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전 할 수 있기 때문에 안하는 겁니다」

퍽이나 논리적이다. 어이를 쌈싸먹은 자식.

「 전 말입니다. 사실 머리가 좋습니다. 아이큐가 130대였어요. 서울대 병원에서 검사한 바에 따르면요」

그나마 다행이네.

「 그래요? 머리가 좋으니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네요. 스스로가 아깝지 않나요? 」

「 그런데 아이큐는 믿을 수 없는거라고 들었습니다. 기준도 들쑥날쑥하고 잔머리를 측정하는거라서 EQ가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계속 이따위 헛소리나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걸까? 재미도 없는데 왜 이러고 죽치고 앉아있어?

「 우리 같이 서점갈래요?」

「 네?」

「 같이 가요. 문제집이라도 골라요」

「 뭐.. 저는 상관없지만. 어머니께서 태워주실거예요」

서점에서 나는 원래 공부를 지지리 못했는데 삼수할 때 열심히 해서 서울대를 간 송재열이란 사람의 ‘공부지존’이란 책을 두권 골라줬다. 아이는 ‘이런거 사봤자 읽지도 않을텐데’하고 투덜거리며 엄마카드로 책을 계산했다.

밖으로 나와 나는 ‘체 게바레 평전’을 아이(나이로는 청년이겠지만, 얼굴은 중학생이니 ‘아이’라고 표현하겠다)에게 건네줬다.

「 받아요. 체게바레 평전이예요」

「 하지만..사실대로 말하면, 아직 과외 할지 안할지도 모르는데요」

「 상관없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해야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한심하고 게으르고.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있을 것 같네요」

나는 뭔가 멋진 대사를 고심했다.

「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사세요. 인생이 재밌다고 믿고, 온몸으로 부딪쳐보세요. 이러니 저러니 투덜거리다보면 인생은 재미없는 것이 되니까요. 제가 과외를 하지 않을 확률이 크겠지만, 이 책이 뭔가 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내가 인생이니 삶이니 하는 말들을 지껄이다니. 아까부터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과외 선생님’ 배역에 몰두했더니 어느새 정말 삶을 사랑하게 되었나봐. 내친김에 마저 해볼까.

「 체 게바레는 열정적인 혁명가였어요. 그렇지만 처음엔 그쪽처럼 회의적이고 의문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은 방황하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시기겠지만 그런 괴로움을 밑거름으로 좀 더 성숙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네요」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다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조명이 밝아져서 바닥에 너절한 쓰레기들이 드러나기 전에 어서 도망가야지.

「 잘 있어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축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감탄에 차서 바라보는 오타쿠 소년의 눈빛이 느껴졌다.

과외 안할지도 모른다고? 잘됐네, 너같은 학생은 나도 피곤하단다. 그나저나 오버하다가 괜히 책값만 날렸네. 체 게바레가 혁명가인건 맞겠지?